작성일 : 15-12-27 01:39
원각사 소장 삼공신회맹록 (2건), 1791년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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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공신회맹록(三功臣會盟錄)

  조선 초기에는 공신들이 집단으로 모여 맹세를 한 공신회맹(功臣會盟)이 행해진 바 있었다. 태조(太祖) 대에는 원년(1392) 개국공신(開國功臣)에게 연회(宴會)를 베풀고 왕륜동(王輪洞)에서 회맹(會盟)한 것을 시작으로 5차에 걸쳐 회맹(會盟)・연회(宴會)・헌수(獻壽)를 베푼 바 있다. 한편 정종(定宗) 대에는 즉위년(1398) 10월에 정사공신(定社功臣) 29인을 거느리고 회맹(會盟)한 것을 필두로 3차에 걸쳐 회맹(會盟)・연회(宴會)를 베풀기도 하였다.
  태종(太宗) 대에는 즉위년(1400) 11월에 개국공신(開國功臣)과 정사공신(定社功臣) 등 이공신(二功臣)들이 상왕전(上王殿)과 주상전(主上殿)에 헌수(獻壽)한 것을 시작으로 16차에 걸쳐 헌수(獻壽)・회맹(會盟)・연회(宴會)・공궤(供饋)를 행한 바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공신(三功臣)이 함께 회맹(會盟)을 한 예는 태종4년(1404) 11월 16(갑인)일, 대청관(大淸觀) 북쪽에서 거행된 회맹이 유일한 예라 할 수 있다.
  <삼공신회맹(三功臣會盟)>은 태종4년(1404) 11월 16(갑인)일, 태조(太祖)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과,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새로운 정권 기반을 마련하고 종사(宗社)를 보존하는데 공을 세운 정사공신(定社功臣), 제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太宗)이 국왕으로 즉위하는데 공을 세운 좌명공신(佐命功臣) 등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 등 삼공신(三功臣)이 대청관(大淸觀) 북쪽 한자리에 모여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고 맹서한 일로서, 당시까지 책봉된 3종 공신이 한자리에 모여 왕실 및 국가에 충성을 서약한 예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삼공신회맹록(三功臣會盟錄)』에는 <삼공신회맹(三功臣會盟)> 때 행해진 회맹의 내용 및 참석한 공신과 수결(手決) 등을 담고 있는 바, 회맹제에 참석한 각 공신들에게 축(軸) 두루마리 형태로 회맹록을 제작하여 발급되었다. 이때 회맹제에는 감사(監司)와 변진(邊鎭)・주(州)・목(牧) 등 지방관(地方官)들도 참여했으며, 회맹제가 끝나고 공신들이 예궐(詣闕)하자 태종은 공신들에게 각각 표리(表裏)를 하사하였고 무일전(無逸殿)에 나아가 연회를 베풀어 공신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삼공신회맹록』의 회맹문(會盟文)은 국왕이 공신들과 함께 희생물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그 피를 입술에 발라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닳도록 왕조에 충성을 다하는 서약(誓約)을 꼭 지키자”는 단심(丹心)의 맹서문이며, 회맹록에 수록된 회맹문과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수록된 동일(同日)의 회맹문과는 자구(字句)에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삼공신회맹록』에 수록된 회맹문 기록이 『태종실록』에 수록된 회맹문 기록보다 훨씬 자세하게 되어 있다.


  2. 삼공신회맹록과 공신교서(功臣敎書)
  이날 <삼공신회맹제>에 참석했던 자들은 회맹록(會盟錄) 한축과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발급받았으며, 회맹록 내지 공신교서 등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1)  좌명공신 교서(敎書)
  이 가운데 공신교서로는 『김영열좌명공신교서및회맹록(金英烈佐命功臣敎書및會盟錄)』이 전하고 있다. 이것은 김영열(1370∼1421)이 태종4년(1404) 11월 16(갑인)일 좌명공신 3등에 책봉될 때 받은 공신교서와 삼공신회맹록으로, 이 가운데 교서만이 전하여 경북유형문화재 제305호로 지정되어 있다. 
    

크기변환김영열좌명공신교서(경북유형 305호).jpg

  2) 삼공신회맹록 목판(木板)
  한편 <삼공신회맹록>의 경우 당시 필사되어 축(軸)으로 만든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삼공신회맹제에 참석했던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 ?-1417)의 후손 이이석(李以錫)에 의해 1791년 축(軸)으로 재간행하기 위한 목판이 현존해 있는 바, 하사받은 회맹축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훼손이 심하여 1791년(정조15) 그의 후손가에서 원본 내용과 형태를 그대로 모사(模寫)하여 나무에 판각하여 제작한 목판(木板)이다.
  <삼공신회맹록 목판>은 원래 전남 문화재자료 146호로 지정된 3판의 목판(일괄)으로, 제1, 2판에는 다음과 같이 <삼공신회맹록>이 판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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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제3판에는 이천우(李天祐)의 후손 이이석(李以錫)이 작성한 <삼공신회맹록>을 새긴 배경과 작업 경위를 설명한 다음 발문이 6행으로 판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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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右昔我
  太宗大王在永樂二年與諸功臣會盟軸而御賜先祖臣一本也今經三百八
    十有八年字畫間多剜缺而惟御諱寶墨尙新神明呵護吁可異矣當時同盟
    之臣似必遍蒙頒賜而周問京鄕勳臣後孫未聞有留存處或恐此軸之久而亦
    泯玆敢模寫鋟梓以爲廣布壽傳之地而元本中諸勳臣姓字下只有着署故攷諸
    勳籍追塡名字以備考覽爾 辛亥仲春完山君臣李天祐後孫臣以錫拜手謹書

  太宗朝御賜完山□[府院君臣李天祐 白鷹圖
  太宗朝御賜完山府{院君臣李天祐 蒼鷹圖
 
  <국역>
  이것은 옛날 태종대왕께서 영락2년(1404)에 여러 공신들과 회맹한 축으로 우리 선조 신(臣) ○○에게 한 본을 하사하셨다. 지금 389년이 지나 글자 획들 사이사이에 결락이 많은데 국왕의 휘자와 어보(御寶)의 먹은 여전히 새로우니 신명의 가호가 있음이다. 기이하도다. 당시 회맹에 참여한 신하들은 필시 골고루 하사의 은혜를 입었을 것이므로 경향 각지의 공신 후손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남아 전하는 곳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혹시라도 이 회맹축이 오래되어 이 또한 사라질까 염려하여 이에 감히 모사(模寫) 판각해서 널리 알리고 오래 전해지게 하려 한다.
  원본 중에는 훈신들의 성 아래에 서명만 있으므로, 공신 관련 여러 전적들을 고증하여 이름자를 찾아 보충하여 상고할 수 있게 하였다.
  신해년(1791, 정조15) 중춘(仲春) 완산군 신(臣) 이천우의 후손 臣 (이)이석 삼가 씀
태종대에 완산부원군 신 이천우에게 하사한 백응도(白鷹圖)
태종대에 완산부원군 신 이천우에게 하사한 창응도(蒼鷹圖)

 

  위 별판(別板)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태종4년(1404) <삼공신회맹록(三功臣會盟錄)> 1축(軸)을 선조이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李天祐)께서 하사받은 지 388년이 지난 정조15년(1791)에 이르러 <삼공신회맹록> 축(軸)이 퇴락하자 이를 영구히 보존할 방안으로 목판에 판각한 후에 여러 부수를 인출하여 후손에게 광포(廣布)함으로써 선조의 공훈사실(功勳事實)을 널리 알리게 하였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원본 회맹축에는 회맹제에 참여한 공신 명단 중 성씨(姓氏) 아래 서명만 있어 공신 관련 여러 전적들을 고증하여 이름을 찾아 보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을 통해 회맹축 원본에는 공신들 직역(職域)과 성씨(姓氏)만 기록되어 있을 뿐, 이름은 기록되지 않은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현재 전하고 있는 삼공신회맹축 문서들이 태종대 회맹제를 거행할 당시의 원본 문서인지 후대에 제작된 문서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본 삼공신회맹축 목판의 사료적 가치는 있다고 하겠다.
  이 목판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 소장된 채, 문화재 자문회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되었던 바 있다.

 

  3) 삼공신회맹록 목판 인출본(印出本)
  위 <삼공신회맹록 목판>으로부터 낱장 형태로 인출된 인출본이 현재 희귀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다음의 인출본 2건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① 김승주 삼공신회맹록판본(三功臣會盟錄板本) : 경북유형문화재 제309호
    좌명공신 4등에 책봉된 김승주(1354∼1424)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삼공신회맹록>으로, 위 목판 인출본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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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함양 도천리 하륜 부조묘 소장 삼공신회맹록 등 고문서 일괄 : 경남유형문화재 제481호
    <삼공신회맹록> 중 좌명공신 가운데 3번째로 책록된 하륜(河崙: 1347-1416)이 기록된, 위 <삼공신회맹록>의 목판 인출본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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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원각사 소장본 : <원각사 소장본> 역시 위 <경북유형문화재 제309호> 및 <경남유형문화재 제481호>와 동일 판목에서 인출된 자료로, 이를 넣었던 피봉까지가 남아 전하는 것으로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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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선장(線裝) 인출본(印出本) <삼공신회맹록> 1책

  <삼공신회맹록> 목판을 제작한 후손 이이석(李以錫)은 위에 언급한 축(軸)을 만들기 위한 목판 제작과는 달리, 선장본(線裝本) 책을 만들기 위한 별도의 목판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선장본 책을 인출하기 위한 별도 판목은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그 인출본 1점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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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출본의 경우, 7판의 목판에 축(軸)을 위한 판본과 동일한 내용을 판각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제7판 말미에는 후손 이이석(李以錫)의 발문이 기록되어 있는 바, 발문 내용은 앞의 목판 발문과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위 <선장본 삼공신회맹록>은 원각사에 소장된 목판 인출본이다. 현재 전하는 유일한 자료로, 종이의 발의 형태를 볼 때 18세기 후반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며, 반곽 30.4×17cm, 8행 23자 형태의 것이다.
  <선장본 삼공신회맹록>의 경우 이 외에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개국공신회맹축(開國功臣會盟軸)> 필사본(古2151-18) 22.8x19.3cm 크기의 것이 전하는 바, 이는 (원각사 소장) <선장본 삼공신회맹록>을 그대로 모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경우 10면 마지막 2행을 순서를 달리해 필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외에 장서각(藏書閣)에는 1900년대 간행된 반곽 24.8×17.2cm, 10행 20자의 목활자본과 반곽 19.7×13.1㎝, 7행 16자의 목활자본 <회맹록(會盟籙)> 등이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 원각사 소장 <삼공신회맹록> 2건
  원각사 소장 <삼공신회맹록>은 동일 내용의 상이한 형태를 한 2건의 자료이다. 하나는 권자본으로 제작된 회맹록 목판 2매를 1매의 종이에 인출한 것으로, 피봉과 함께 전해진 것이다. 이 자료의 경우 2건이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 하나는 <삼공신회맹록> 선장본 1책으로, 현재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이자료의 필사본 1책이 전하고 있다.

 

  1) <삼공신회맹록> 1매(피봉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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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 開國定社佐命三功臣會盟文

  발급 國王

  수급 未詳

  연대 甲申(1404) 11月 16日; 辛亥(1791) 仲春

  형태 1枚 ; 112 × 96cm

  주기 祝文 : 維歲次甲申(1404)十一月己亥朔十六日甲寅 朝鮮國王臣李 謹...
      (跋文) : 辛亥(1791)仲春完山君臣李天祐後孫臣以錫拜手謹書

 

  원각사에 소장된 <삼공신회맹록> 2건 중 하나는 앞서 언급한, 이이석(李以錫)에 의해 1791년 축(軸)으로 재간행하기 위한 목판에서 인출된 것으로, 피봉까지가 남아진 보존상태가 양호한 자료이다. 이와 동일한 인출본이 <경북유형문화재 제309호> 및 <경남유형문화재 제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군신회맹문(君臣會盟文)> 또는 <개국정사좌명삼공신회맹문(開國定社佐命三功臣會盟文)>이라 칭하기도 하는 이 자료는 15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자료의 18세기 복각 인출본으로, 조선 성립기의 중요 역사적 자료를 담고 있으며 전래본 또한 희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용으로는 갑신(甲申, 1404)년 11월 16일,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즉위한 뒤 조선 개국에 공로가 큰 개국공신(開國功臣)과 제1, 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혁명과 집권에 공이 큰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 등 66명과 함께 맹세의 제를 하늘에 지낸 것으로,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종묘사직(宗廟社稷), 산천백신(山川百臣)의 영(靈) 앞에 나라의 군신(君臣)과 붕우(朋友)의 관계를 집에서의 부자(父子), 형제(兄弟)의 관계와 같이 충신성각(忠信誠慤)으로써 할 것을 다짐한 기록이다.  또한 자손대대로 친목할 것을 맹세한 내용과 함께 공신들과 그 후손들을 잘 보살펴주겠다는 서약이 담겨진 문서로, 2장의 목판에 새겨 1매의 종이에 인출한 것이다.  상단에 다음과 같이 왕의 축문(祝文)이 새겨져 있다. “維歲次甲申(1404)十一月己亥朔十六日甲寅 朝鮮國王臣李 謹率開國·定社·佐命功臣等 敢昭告于皇天上帝·宗廟·社稷·山川百神之靈 伏以國之有君---.” 또한 축문 말미에 ‘국왕(國王) 신(臣) 이방원(李芳遠)’이란 글이 궤 안에 새겨져 있다.  이어 하단에는 회맹식에 참여한 공신의 명단으로 의안대군(義安大君), 영안대군(寧安大君), 봉녕군(奉寧君), 완천군(完川君), 상락부원군 김사형(上洛府院君 金士衡), 진산부원군 하륜(晋山府院君 河崙), 창녕부원군 성석린(昌寧府院君 成石璘) 등 66명의 명단과 각각 수결이 판각되어 있다.

 

  2) <삼공신회맹록> 선장본 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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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 開國定社佐命三功臣會盟錄

  저자 왕실, 편자 李以錫

  판종 木版本

  발행 영광 : 辛亥(1791); 永樂2(1404)  형태 1卷 1冊 ; 36 × 22cm

  판식 四周單邊, 半郭 30.7 × 16.8cm, 有界, 半葉 8行23字, 無魚尾

  주기 발문: 辛亥(1791)仲春 完山君臣 李天祐後孫 臣 以錫 拜手謹書

 

  1791년 전라도 영광에 거주한 진사(進士) 이이석(李以錫)이 판각 인출한 것이다. 권말(卷末)의 이이석 발문에 의하면, 이 [회맹록]은 영락2년(1404) [공신회맹축] 1축(軸)을 선조께서 하사 받은지 388년이 지난 정조 15년(1791)에 이르러 축(軸)이 퇴락하여 이를 영구히 보존할 방안으로 목판에 판각한 것이다. 판각 후 이를 여러부 찍어 후손에게 광포(廣布)하여 선조의 공훈 사실을 알리게 한 것이다.
  앞부분에는 종묘에 나가서 고한 기로문(祈告文)이 5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 ‘국왕 신 이방원(國王臣李芳遠)’이 1면에 새겨져 있고, 다음으로 7면에 걸쳐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이 실려 있다. 그 내용으로는 회맹에 참여하였던 4인의 종친과 62인의 공신명 및 각각 수결이 새겨져 있다.
  한편 말미에는 정조(正祖) 15년(1791)에 판각케 되었던 내력을 밝힌 이천우(天우)의 후손 이이석(李以錫)의 발문이 판각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開國功臣會盟軸]이란 이름으로 필사본만 전해질 뿐, 당시 목판 인출본이 전해지는 것은 조사된 바 없는 바,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4. 문화재적 중요성
  <삼공신회맹록>은 2건으로, 그 중 하나는 동일 인출본이 <경북유형문화재 제309호> 및 <경남유형문화재 제48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삼공신회맹록> 선장본 1책으로 현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성격상 동일한 이 2건의 자료는 충분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정리 : (정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