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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20 10:10
[고승유목] 월하스님 병풍, 1985년
109×32.5㎝

(을축년(1985))
     

 

三生石上舊情魂 (삼생석상구정혼)
賞月吟風莫要論 (상월음풍막요론)
慙愧情人遠相訪 (참괴정인원상방)
此身雖異性長存 (차신수리성장존)
身前身後事茫茫 (신전신후사망망)
欲話因緣恐斷腸 (욕화인연공단장)
吳越山川尋已遍 (오월산천심이변)
却廻煙掉上瞿塘 (각회연도상구당)

삼생돌 위 옛 주인이여 달구경 풍월함은 말하지 마라.
부끄럽다 정든 사람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몸은 비록 다르나 자성은 항상 같다.
전생 내생 일이 아득하여 알 수 없는데 인연을 말하고자 하니 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
오나라 월나라 산천은 이미 다 보고 도리어 배를 돌려 구당으로 간다.

佛法只在世間中 (불법지재세간중)
離世覓佛求兎角 (이세멱불구토각)
眞心只在妄念中 (진심지재망념중)
離妄覓心求龜毛 (이망멱심구귀모)
欲求佛道初信正 (욕구불도초신정)
菩錯一信隔天地 (보착일신격천지)
正法不分出在家 (정법불분출재가)
無量衆生皆佛芽 (무량중생개불아)

불법은 자못 세간 가운데 있다.
세간을 여의고 부처님 찾는 것은 토끼 뿔을 구하는 것이다.
참된 마음은 단지 망념 가운데에 있다.
망념을 여의고 마음을 찾으려는 것은 거북이 털을 구하는 것과 같다.
정법은 재가와 출가를 나눌 것 없이, 한량없는 중생들 모두 부처의 싹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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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스님>

1915년 음력 2월 25일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천은 법호(法號)이고 법명이 월하(月下)이다. 속명(俗名)은 희중(喜重). 조선말 통도사에 주석했던 성해(聖海)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 구하(九河,1872-1965)스님의 법을 이었다.
어릴 때 집 근처의 고란사 스님들을 보면서 출가를 결심하였다. 이때 속가의 부모님이 설득했지만 결국 18세인 1933년 강원도 유점사에서 성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득도한 후, 1940년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법을 이었다. 오대산 한암스님 회상에서 안거를 성만하셨다. 1944년 4월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50년도부터 30여년간 통도사에 전계대화상으로 후학 양성에 힘쓰셨다.
이(理)와 사(事)를 두루 겸비한 스님은 1954년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함께 사찰정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해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다. 195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이 되었고, 1956년 통도사 주지를 하시면서 사찰 내 폐습을 일소하고 강원과 선원을 복원했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8년 조계종 총무부장 권한대행,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직을 수행했다. 1970년부터는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 보광전 염화실에 주석하며 통도사를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된다. 1975년 동국학원 재단이사장,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 1980년 종정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1984년에는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1994년 종단 개혁때는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1994년에는 조계종 제9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을 재추대 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종단의 어른으로 자리하였다.
스님은 50여년 가까이 통도사 보광선원을 떠나지 않고 조실로 머물면서 눈푸른 납자들을 지도해왔다. 함께 수행하며 늘 수좌들을 자상하게 지도했던 스님은 졸음에 겨워하는 납자들을 야단치거나 죽비로 때리는 대신 “졸음이 올 때는 일어나 경행(輕行)하라”고 이르며 자비롭게 대해왔다. 언제나 문을 열어놓은 채 지위고하와 노소를 막론하고 방문자들을 맞았고, 대중운력에 빠지지 않고 손수 자신의 빨래까지 하는 수행자의 청규(淸規)를 지켜왔다. 詩(시) · 書畵(서화)에도 능했던 스님은 옛 조사스님들의 선시 전통을 이으면서도, 간단 명료한 언어와 선기 넘치는 선시를 지어왔다. 스님의 선시는 1998년 문도들에 의해 《월하대종사 상당법어집》으로 묶여진 바 있다.
월하스님은 자신의 가풍에 대해 “안으로 구하는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하는 것이 없는 것 자체”라고 말하였다. 대중교화에도 남다른 애정을 지녀, 1920년대 중반부터 통도사에서는 대중법회를 개설하여 한 달간 전국 고승들의 법문을 들려주는 화엄산림이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데, 이러한 교화사업이 안정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데는 방장스님의 원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후 늘 통도사를 지키는 어른으로서 사격을 일으키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994년에는 종단개혁의 깃발이 오른 뒤 종정의 자리에 올라 종단어른으로 역할을 하였으며,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후진양성에 필력을 다하였다.
월하스님은 2003년 12월 4일 오전 9시 15분께 세수 89세, 법랍 71세로 열반하셨다.

* 2017. 9. 13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