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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8-12 03:04
종교란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은 <2011년 9월 11일> 길상사 일요법회에서의 정각스님 법문 내용이다.

테이프 녹음을 받아 쓴 후, 이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회소곡(會蘇曲)
  내일은 음력으로 8월 15일, 민족 명절인 팔월 한가위입니다. 이에 먼저 절기와 관련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에 앞서 숫자에 대해 말하자면, 숫자에도 음(陰)과 양(陽)의 구분이 있어 음의 숫자인 우수(偶數)와 양의 숫자인 기수(基數)가 있습니다. 1⋅3⋅5⋅7⋅9 등 양(陽)의 숫자는 기수(基數)에 해당하며, 2⋅4⋅6⋅8⋅10 등 음의 숫자는 우수(偶數)가 됩니다.
  그 가운데 양의 숫자인 기수가 중복되는 날을 중양절(重陽節)이라 합니다. 양의 숫자가 중첩된[重] 상서로운 날로서, 1월 1일 원단(元旦)과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端午), 7월 7일 칠석(七夕), 9월 9일 중구일(重九日)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원단(元旦)으로부터 생겨난 양의 기운이 삼월 삼짇날과 오월 단오, 칠월 칠석을 거쳐 그 기운이 융성해 감을 뜻합니다.
  그러나 칠월 칠석을 기점으로 우주의 기운은 양에서 음으로 교차하게 됩니다. 오작교(烏鵲橋)라 불리는 상징적인 다리에서 만나, 양을 뜻하는 견우(牽牛)가 음의 상징인 직녀(織女)에게 우주 섭리의 권능을 넘겨주는 ‘우주 에너지의 교차의식’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칠월 칠석부터 우리 주변에는 음(陰)의 기운이 서서히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부터 칠월 칠석 날, 저녁에는 아녀자들이 장독 위에 깨끗한 물을 떠 놓고 저녁 달 바라보며, 별을 보며 ‘걸교(乞巧)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구할 걸(乞), 즉 기교(技巧)를 구하는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베를 잘 짤 수 있게끔, 기교(技巧)를 구하는 제사였습니다.
  예부터 칠석이 지나면, 다음날부터 민가에서는 ‘베 짜기 행사’를 벌였습니다. 경주 풍속을 전하고 있는 『경도잡지(京都雜誌)』에 의하면, ‘신라에는 6부(部)의 부족이 있었는데, 그 여섯 부족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칠석부터 8월 한가위까지 베 짜기 시합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제 곧 차가운 겨울이 찾아올 것이기에, 의복을 준비하기 위한 베를 짜는 기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음력 8월 14일 저녁이 되면, 6부의 여자들이 짜 둔 베를 놓고 어느 편이 ‘더 많은 양질의 베를 짰는가?’ 심사하게 됩니다. 이긴 편에서는 기쁨의 노래를 불렀고, 진편에서는 슬픔의 노래를 불렀는데, 슬픔의 노래 곡조(曲調)가 애절하고 노래 가운데 ‘회소(會蘇)’란 가사가 있는 까닭에 그 노래를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 했다고 합니다.

 

  슬픔의 애달픈 정서
  그 회소곡과 함께 팔월 한가위가 열리고, 이제 음(陰)의 기운이 그 힘을 더해가는 때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음의 기운은 9월 9일 중구일(重九日)을 맞아 치성한 채, 양의 기운이 쇠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사라지는 양의 기운이 아쉬워, 중구일 날 사람들은 화전(花煎)을 만들어 먹습니다. 전(煎)을 만들되, 한쪽에 국화잎으로 여덟 장 꽃잎을 붙여 태양 문양의 화전을 만들어 먹습니다. 양(陽)의 에너지, 태양의 기운을 몸에 조금이나마 더 간직코자 했던 염원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주변의 양(陽)이 쇠하고 음(陰)의 세력이 확산되는, 그때 회소곡(會蘇曲) 슬픈 노래가 울립니다. 한쪽에 기쁨이 있으면, 다른 한쪽에는 슬픔의 애절한 노래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의 애달픈 정서가 있다는 것. 그럼에도 태양 볕은 내려 쬐고, 태양 볕을 받는 중생마다의 근기에 따라 누구에게는 슬픔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 생각해 보면 모두가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생들 업(業)의 차이에 의해 기쁨과 슬픔이 있어 보입니다.
  똑같이 비는 내리는데, 왜 나는 비를 맞지 못하고 있습니까? 방안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 밖에 나가면 반가운 비를 맞을 수 있습니다. 왜 방안에 있습니까? 방안에 있게끔 스스로 그것을 좋아하고, 그러한 업(業)으로 인해 비를 맞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늘은 여전히 햇볕 비추고, 또한 비를 뿌립니다. 모든 것은 자신 업(業)의 의지와 관련 맺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스님이란 호칭
  길상사에 참으로 여러 해 만에 오게 되었습니다. 법정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 다녀갔는데, 벌써 몇 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법정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즈음,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법정스님 열반과 관련해 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훌륭한 스님이 돌아가셔서 안타깝다’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밑에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무슨 법정 「스님」이냐? 왜 기독교에서는 아무개 「목사」라 하고, 가톨릭에서는 아무개 「신부」라 하는데, 왜 불교에서만 아무개 「스님」이라 하여 「님」자를 거기에만 붙여 두느냐?”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법정스님」 하지 말고, 그냥 「법정스-」라 하자”는 댓글이 붙기도 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누군가 「국가인권위원회」 ‘차별분과 소위원회’에 정식 제소를 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목사, 천주교에서는 신부, 그런데 왜 불교에서만 「스님」이라는 「님」자를 붙입니까? 이것은 차별입니다. 법적으로 「님」자를 없애 차별을 해소할 수 있게, 인권위원회에서 해결해 주십시오!” 라는 청원이 올라간 상태라는 것입니다.
  「스님」 아닌 「스-」라 부르자는 것. 또 다른 댓글에서는 “「스-」도 이상하다. 그냥 「중」이라 하자”는 의견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보며 재미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옛날에는 편지봉투 하단에 밑줄이 그어진 채 「님」자가 인쇄된 봉투가 많았습니다. 당시 도반스님에게 보내는 편지 겉봉을 쓰면서 저도 “○○스-”라고 썼던 일을 생각하고 웃음이 생겨났습니다. 한편 제가 20년 전, 속리산 법주사에서 소임을 맡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침나절, 법주사 널찍한 마당에서 포행(布行)을 하던 차에 노인 한분이 뭔가를 묻고자 오셨습니다. 저한테 “중님!” 하고 부르셨습니다. 「중」이란 호칭을 듣고, “저 노인분이 학식이 있으시구나!”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신라의 왕명
  신라시대, 왕(王)이란 호칭이 사용되기 전 왕에 대한 4종의 칭호가 쓰였습니다.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이 그것입니다.
  거서간(居西干)은 ‘서(西)쪽 칸(干)에 머물며(居) 태양을 마주하는 자’를 뜻함이 아닙니다. 고대 알타이어 가운데 코시군(qoshigun)을 음사(音寫)해 사용한 말로, 흉노족 내지 선비족의 언어 가운데 코시군은 ‘6부족의 집단’ 내지 ‘6부족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명칭입니다. 조금 전 ‘걸교의 제사’를 얘기하면서 ‘신라 6부의 여자들’을 말했듯, 신라 6부족 연맹체의 우두머리를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했던 것입니다. 가야국(加耶國) 역시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금관가야, 비화가야 등 6부족 연맹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차차웅(次次雄)은 이렇습니다. 『삼국유사』에 차차웅은 혹 자충(慈充)이라 하며,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무(巫)를 말하는 것이다’라 하였다고 합니다. 즉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이자 통치자를 뜻하는 것으로, 「巫」란 하늘(ㅡ)과 땅(ㅡ)을 연결하는(ㅣ) 사람들(人人)을 말합니다. 한편 국어학자들 견해에 의하면 <차차웅 → 차웅 → 충 → 즁 → 중>으로 단어가 변천된 것이라 합니다. 즉 「중」이란 신라시대 왕을 뜻하는 차차웅이 변천된 말임을 알게 됩니다. 「중」이란 「왕」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이사금(尼師今)이란 『삼국유사』 가운데 ‘치리(齒理)’ 즉 ‘이빨 자국’을 뜻한다고 합니다. 남해차차웅이 죽자 그의 아들 노례(弩禮) 즉 유리(儒理)가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코자,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다” 말하고 떡을 깨물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탈해가 떡을 깨물어 뱉으니 이빨 자국이 유리왕보다 많아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치리(齒理) 즉 이빨 자국을 뜻하는 ‘잇금’이 ‘이사금’이 되었고, 후에 ‘임금’이란 말로 변형되었습니다.
  한편 마립간(麻立干)이란 말뚝, 즉 궐(橛)을 뜻합니다. 『삼국유사』에 “말뚝[橛]은 서열[諴操]을 뜻하는 방언으로, 왕궐(王橛)이 주(主)가 되고 신궐(臣橛)은 아래에 배열함을 인하여 이름한 것이다” 하고 있습니다. 국어학자들에 의하면, 마립(麻立)은 마루[宗], 마리[廳] 등과 동일 어원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에 마립간은 마루칸(麻樓干), 누칸(樓干) 등으로 사용되며, 마루를 뜻하는 종(宗)자를 빌어 종간(宗干)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이상의 얘기를 듣고 보면, 조금 전 노인이 「중님!」이라 불렀던 말이 수긍이 갈 것입니다.

 

  종교(宗敎)의 불교적 의미
  이상, 왕명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이제 종교(宗敎)란 말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조금 전 마립간(麻立干)을 마루칸(麻樓干) 내지 종간(宗干)이라 칭한다 함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마루>란 말과 <종>이란 말은 동일한 뜻임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옥편을 찾아보면 종(宗)이란 ‘마루 종’ 또는 ‘으뜸 종’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한편 <마루>란 ‘높다’는 뜻이 있기도 합니다. 한옥 건축에서 마루는 바닥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하며, 그 높은 곳에 앉은 자를 마립간(麻立干) 내지 마루칸(麻樓干), 또는 종간(宗干)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종간(宗干) 등의 뜻을 바탕으로 종교(宗敎)란 말을 풀이하면, 종교(宗敎)란 ‘높은 곳(에 위치한 자)의 가르침’이 됩니다. 마립간, 마루칸, 종간의 명령 내지 교지(敎旨)를 뜻합니다. 즉 철회할 수 없는 지상의 명령이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종교(宗敎)란 말은 중국 남북조 시대로부터 사용된 불교 용어입니다. 남북조 이래 수(隨), 당대(唐代)에 걸쳐 불교학자들은 경전 내용을 명(名), 체(體), 종(宗), 용(用), 교(敎) 등으로 나눠 설명했는데, 여기에 종(宗)과 교(敎)가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천태종의 중흥자인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智顗: 538~579)는 『법화현의(法華玄儀)』란 책에서 “불교 교리의 요지를 종(宗)이라 하고, 종(宗)을 표현하는 언어나 문자를 교(敎)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종(宗)의 교(敎)>를 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자대사의 이런 설명은 중국 종파불교(宗派佛敎)의 융성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는 너무도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팔만 사천 법문이 담겨진 [대장경]. 해인사에 모셔진 고려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경판(經板) 숫자가 무려 8만 1352판에 이르는데, 8만여 판에 이르는 경판 숫자에 빗대어 이를 [팔만대장경]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앞뒷면을 합해 16만 장을 넘는 팔만대장경은 1,511부, 6,802권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
  팔만대장경은 이후 [고려대장경] 45권으로 영인되었으며, 1965년부터 37년간의 노력 속에 318권 분량의 [한글대장경]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한글 번역본의 경우 상⋅하단으로 나뉜 채 1천 페이지 두께의 책으로 총 318권 분량에 이르다 보니, 한 번 읽어내기가 어렵습니다. 하루 한권씩 읽는다 해도 1년 정도가 걸리겠지요? 만해 한용운스님의 경우 백담사에 머물며 한문으로 된 [팔만대장경]을 열람하는 데만 총 3년 6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내용이 많다 보니, 전체 경전 중 특정 경전을 택한 채, ‘화엄경의 가르침’ 내지 ‘법화경의 가르침’ 등 특정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하는 종파(宗派)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각 종파에서 주장하는 각각의 가르침을 종교(宗敎)라 칭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불교(佛敎)란 ‘전체 종파의 종교’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가르침임을 알게 됩니다.

 

  종교(宗敎), Religion의 번역
  그럼에도 현재 대부분 사람들은 종교(宗敎)를 서구식 개념인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宗敎)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19세기말, 일본 메이지(明治)시대의 선승(禪僧) 스즈끼 젠꼬(鈴木全子)에 의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릴리젼(religion)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이 단어에 대한 설명으로는 보통 4세기경의 호교론자 락탄시오(Lacius C.F. Lanctantius)의 견해를 따르게 됩니다. religion은 religare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다시, 재차>를 뜻하는 라틴어 접두어 re와, <연결, 결합하다>는 뜻의 동사 ligare가 합해진 말이라 합니다. 즉 ‘원죄(原罪)로 인해 단절된 신(神)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다시 연결함’에 초점이 맞춰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단절된 관계성의 연결’ 내지 ‘재결합’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성서] 「모세오경」 중 『창세기』 내용을 개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전반부는 ‘창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야훼’라는 신이 등장합니다. 당시 세상에는 어둠과 혼돈(mythos)만이 존재하였고, “빛이 생기라”는 야훼의 말(logos)에 의해 빛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어 빛과 어둠이,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세상 형태가 갖춰진 가운데 야훼는 6일에 걸쳐 이 땅에 살아갈 수많은 생명을 창조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야훼’의 모습을 닮은 존재, 인간을 흙으로부터 만들어 숨을 불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든 인간을 ‘아담’이라 하였습니다. 아담의 왼쪽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이브’라 부른 채 그들을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에 살되, 그곳에 심겨진 사과나무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령(禁令)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 살던 뱀이 아담과 이브에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사과를 따먹으면, 야훼와 같이 이성(理性)이 열려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들은 사과를 따 먹었습니다. 사과를 따먹는 그 순간, 야훼가 말했다고 합니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그때 아담은 부끄러움으로 몸을 가린 채 “Adsum!” 이라고 히브리어로 대답합니다. Adsum을 라틴어로는 Hic et nunc라 번역하며, 영어에서는 Here and now 즉 “지금, 여기 (있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위 야훼의 질문은 ‘현재의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라는 존재적 질문이 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 ‘Hic et nunc’, ‘Here and now’, ‘지금 그리고 여기 (있습니다)’는 표현은 20세기 초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칼 야스퍼스(Karl T. Jaspers)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등은 위 표현 내지 정황을 즐겨 설정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 좌표에 위치한 역사성(歷史性)의 인간. 우주의 공간 속에서, 현재의 시간 가운데 나는 어디 자리해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고 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 빌헤름텔의 사과, 뉴턴의 사과 등. 어찌 되었건 사과를 따 먹은 아담과 이브는 원죄(原罪)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아담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생겨났고, 이브에게는 출산의 고통이 생긴 채 광야에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후손들 또한 원죄를 안고 태어난 채, 그에 대한 속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과를 따먹기 전에는 야훼와 인간이 긴밀한 관계성을 유지했는데, 그 관계성이 끊겼다는 것입니다. 그 끊겨진 관계성을 릴리젼(religion), 즉 다시 연결코자 하는 것, 그것이 종교라는 얘기입니다.

 

  종교성, 내몬다는 것
  위 religion이란 단어 속에 종교의 서구적 개념이 담겨 있다면, 종교성의 참된 의미는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미사(Misa)라는 말 속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금세기 위대한 종교학자 하인리히 짐머(Heinrich Zimmer)의 제자 중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10년 전쯤 조셉 캠벨은 영국 BBC 방송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의 인터뷰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신화의 힘』이란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그 책 가운데 <미사>와 관련된 얘기가 등장합니다.
  미사(Misa)란 그 어원이 미떼레(mittere)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여기서 mittere라는 단어는 ‘내몰다’ ‘추방하다’ ‘내쫒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위치한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를 밖으로 내몬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상황, 그 삶의 상황에 만족하지 말고 또 다른 진리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가운데 누군가, 그 어떤 힘이 등 뒤에서 나를 떠밀고, 내쫒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몰다’ ‘쫓아내다’ ‘추방하다’는 말은 현재의 범속한 삶에 만족하지 말고 영원의 세계에로 나아갈 것을 재촉하면서 나의 등을 밀어대는 것, 거기에 mittere라는 단어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종교의 참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불교에서의 예불(禮佛) 역시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의 예불이란 내가 위치한 현재적 상황, 그 상황에 만족하지 않은 채 또 다른 미지의 세계에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 그것에 예불의 참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애로움과 연민의 마음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 가운데 불교(佛敎)란 무엇을 말하고 있겠습니까? 흔히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하며, 불교는 ‘자비(慈悲)의 종교’라 합니다. 여기서 자(慈)는 범어(梵語) meta의 번역어로 자애로움을 말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Hesed의 번역어인 기독교적 아가페(agape)적 정신과 유사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편 비(悲)는 범어 karuṇa의 번역어로, ‘슬픔 내지 연민’을 뜻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동정심(同情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남의 슬픔에 동참하고, 기쁨에 동참한 채 같은 정(情)을 나눔을 뜻합니다.
  수계(授戒)하고 법명을 받아 불교인이 되지 않고,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 하여 승(僧)이 되지 않습니다. 참된 불제자(佛弟子)란 마음속에 ‘자애로움’과 ‘남을 위한 연민’ 즉 자비(慈悲)를 갖춘 자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盲兒得眼)」조는 불교 자비의 극치를 보이는 다음 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경덕왕 때, 한지리에 사는 희명(希明)이란 여인의 다섯 살 난 아이가 눈이 멀었습니다. 희명은 분황사 천수대비(千手大悲) 앞에 나아가 아이로 하여금 다음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어 삷아 두나이다. 즈믄[千: 천개] 손 즈믄 눈 가지셨으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오니 하나를랑 주시옵시라. 아아 나에게 주시옵시사. 나에게 주시면 자비가 클 것이로다.”
  천개의 눈 중 하나를 덜어 중생에게 건네는 관음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와, 그에 의탁한 중생의 비애를 표현한 예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숙한 불제자는 대자대비의 청구자(請求者)인 희명과 다섯 살 난 아이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스스로가 자비 연민의 실천자가 되어야 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대학 1학년 때 니체(F. Nietzsche)의 전기를 읽던 저는, 니체의 어린 시절 모습에서 연민(憐愍)의 실천을 발견하였습니다. 철학자 발터 니그(Walter Nigg)는 니체의 전기 가운데 어린 시절 니체의 감수성에 얽힌 다음의 감동적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어머니는 니체에게 여자 옷을 입혀 길렀다고 합니다. 여자 옷을 입고 자란 탓인지 니체에게는 여성적 감수성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습니다. 다섯 살 때였습니다. 니체의 집 앞에는 언덕이 있었습니다. 마을 언덕에서 뛰놀던 니체는 언덕 밑 수레 가득 짐을 실은 우마차와, 그것을 끌고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소 한 마리를 목격하였습니다. 농부의 채찍 맞으며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소의 고통스러운 눈과 마주친 니체의 눈에서는 한줄기 뜨거운 연민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채찍 맞으며 힘겨운 발걸음 옮기는 큰 눈망울의 소, 그 광경 바라보며 우리는 어린 니체와 같은 연민의 눈물 흘릴 수 있겠습니까? 타 존재의 슬픔을 보고 한 방울 눈물 흘릴 줄 아는 바로 그 마음이 관음보살의 마음이며, 기독교적 사랑을 넘어 불교적 자비, 연민을 촉구하는 척도라 하겠습니다.

 

  맺으며
  내일 추석을 앞두고 절기 얘기와 함께, 「중」이란 명칭, 「종교」 내지 「불교」란 단어의 의미를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나(我). 그리고 내 자신 현실 속에서 또 다른 삶의 차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즉 mittere란 단어와 함께 종교성의 참된 의미를 말씀 드렸습니다.
  한편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의 뜻과 함께, karuṇa 즉 연민과 연민의 실천자 니체의 일화를 전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자비의 실천자, 연민의 마음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을 말씀드리며 마치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