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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8-10 01:30
삶의 의미를 찾아서

다음 내용은 <2001년 2월 11일> 능인선원 일요법회에서의 정각스님 법문 내용이다.

테이프 녹음을 받아 쓴 후, 이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만남의 의미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뵙게 된 것은 불교에서 얘기하듯 전생부터 만나야 할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렇듯 여러분과 대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수많은 시간들,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무수한 ‘만남’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을 만나고, 또 다른 자리에서 무수한 사람과 사건들, 사물들과 만남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란 것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 여기에는 분명 어떤 까닭이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불현듯, 무수한 사건과 사물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 맞닥뜨리는 사건과 사물과,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그런 질문에 앞서,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무수한 길을 걸으며 수많은 만남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리고 만남 속에서 만남의 의미성 뿐만이 아닌, 나(我)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점을 가져 보기도 합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我)라 하는 것. 나에 대해 숙고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나(我)라는 존재. 나는 왜 지금, 이 세상 가운데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나에게 있어 삶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현재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가 행해야 할 바는 과연 무엇인가?
  여러분 모두 그런 생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삶을 살아가는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나(我)란 존재는 무엇인가?’ 이같은 질문은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해답을 마련해 갖지 못하는 한에 있어, 그 사람의 삶은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 Kant)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라는 것 등에 대한 해답을 먼저 마련해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삶의 여행자
  비유로 말씀 드리면, 여기 모든 사람들은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여행자, 즉 ‘삶의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 불리는 무수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끝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여행자. ‘삶의 여행자’로서 저와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 그 삶의 여행길 속에서 삶의 여행자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어떻게 여행의 종착점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겠습니까?
  「그리스⋅로마 신화」에 묘사된 오디세이(Odyssey)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오디세이라 불리는 인물은 신화 속에서 끝없는 여행을 계속해야만 하는, 여행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여행을 자기 숙명인 양 받아들인 채, 끝없는 여행을 떠납니다. 한때 오디세이가 사막의 여행길을 가고 있던 때, 사막 한가운데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피라미드 앞에는 스핑크스(Sphinx)라 불리는 동물이 앉아 있었습니다. 스핑크스는 사막의 여행자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면, 여행자는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혀 버리게 됩니다.
  오디세이가 사막의 여행길 중 스핑크스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스핑크스가 오디세이에게 물었습니다.
  “아침에 네발로 걷고, 점심때 두발로 걸으며, 저녁때는 세발로 걷는 그러한 자는 누구인가?”
  오디세이가 대답합니다.
  “그것은 인간입니다. 태어나 아이 때에는 네발로 걷고, 나중에 장성해 두발로 걸으며, 인생의 황혼녘이면 지팡이를 의지해 세발로 걷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남긴 오디세이는 스핑크스 앞을 지나 또 다른 여행의 목적지를 향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길을 걷는 모든 여행자에게 스핑크스의 질문은 끝없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스핑크스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줄 수 있어야만, 스핑크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채, 또 다른 여행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 있는 모두에게도 매순간 스핑크스의 질문이 끝없이 던져지게 됩니다. 법회를 마치고 길을 나서는 순간, 스핑크스는 스핑크스의 모습이 아닌 우리가 맞닥뜨리는 ‘사물과 나와의 만남, ‘나와 남과의 만남’ 가운데, 무수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내가 만나게 되는 모든 상황들, 사람과의 만남, 사물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겠습니까? 제대로 된 해답을 남길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숲속 오솔길
  20세기 후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친 실존주의 철학이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적 인물 하이데거(M. Heidegger)는 그의 저술 가운데 독일의 시인 횔덜린(F. Hölderlin)의 다음 시 구절을 종종 인용하였습니다. “오직 사냥꾼만이 숲속 오솔길(holzwege)을 알고 있다.”
  여기서 사냥꾼이란 ‘진리의 사냥꾼’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자, 진리의 사냥꾼만이 숲속 오솔길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숲속 사냥꾼은 한 마리 토끼와 한 마리 새를 잡기 위해, 숲의 무수한 공간을 찾아 헤맵니다. 그 무수한 헤맴 가운데 사냥꾼은 자기만이 알 수 있는 오솔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오솔길을 통해 숲의 모든 장소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펼쳐져 있는 삶이란, ‘숲속’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숲속이라 불리는, 우리를 둘러싼 삶의 상황 속에 한 마리 새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숲속 길, ‘진리의 길’을 찾아 진리의 사냥꾼이 됩니다.
  그 ‘진리의 길’이란 오직 진리를 위해 끝없이 고뇌하고 방황하고, 그것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에게만, 숲속 오솔길은 보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먼저 간 자는 숲속 오솔길을 알게 됩니다. 산등성이 넘어 냇물이 있고, 그곳에 몇 개의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의상(義湘)스님은 「법성게(法性偈)」 가운데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 하였습니다. “증득한 지혜로만 알 뿐이요, 나머지 경계가 아니다”는 말입니다. 그 길을 먼저 간 자를 선지자(先知者)라 합니다. 그는 자신이 건넌 징검다리 중 몇 번째 돌이 위험함을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숲속 길을 걷다 ‘소나무 숲을 보았다’ 말한다면, 그 숲을 지나 샘물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 나름대로 수많은 길의 의미를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일상적 삶의 길과 진리를 향한 깨달음의 길이 있습니다. ‘일상적 삶의 길’ 그리고 ‘진리에의 길’. 여기에는 확연한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종교, 끝없는 여행

  종교라는 것, 그것은 세속과의 타협이 아닙니다. 조건 지어진 삶의 상황 가운데 우리를 만족케 해 주는 질서가 아닌, 나의 삶에 만족하지 말고 또 다른 삶의 조건을 향해 무수히 나아가기를 촉구하는 것, 거기에 종교의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앙드레 지드(Andre Gide)의 소설 『지상의 양식』 중 주인공 메날끄의 말, “정지하지 말고 만족하지 말고…또다시 찾아 허덕이라”는 그 의미성을 종교의 의미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교의 참된 의미는 현실적 조건의 충족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현실의 상황은 단지 우리에게 영원한 길의 모상만을 스크린에 비춰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스크린 속에 나 있는 오솔길을 찾아 끝없이 길을 가는 ‘나그네’가 될 수 있기를 종교는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제가 서두에서 ‘길을 걷는 나그네’를 말씀 드렸습니다. 저와 여기 모든 분들은 삶의 길 가운데 여행자에 해당합니다. 그 삶의 여행길 가운데 수많은 질문, 스핑크스의 질문에 답하면서 끝없는 여행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삶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오디세이의 방랑 여정과도 같이, 아마도 델피(Delphi)의 신탁(神託)이 존재하는 한 방랑 또한 끝없을 것이라면, 우리 삶의 여행 또한 끝없는 목적을 행한 끝없는 여행일 것입니다.

 

  왜 사는가
  삶의 목적은 그렇다 치고,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나(我)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지금, 이 시간과 공간 속에 한 생명체로서 탄생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무슨 까닭이 있어 보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데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어 보인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 이유를 알고 계신가요? 시간과 공간 가운데 조건 지어진 삶을 살아가는 그곳에, 삶의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에 나름대로의 해답을 갖고 계시는가요?
  고등학교 때 국어책 중에서 김상용의 시(詩) 「남으로 창을 내겟소」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인생에 대한 시(詩)였던 것 같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구절이 기억납니다.
  ‘왜 사느냐?’ 누군가 질문한다면, 뭐라 대답할 수 없는 겸연쩍은 느낌 속에서 다만 피식 웃어버린다는 건가요? 아마 대다수 사람들이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왜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나름대로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차안(此岸),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언덕 위에 발 딛고 사는 나(我)란 존재는, 현재 펼쳐진 삶의 상황 속에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분명 나란 존재가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삶에는 분명 어떤 목적성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삶, 살아갈 줄 안다는 것
  그렇다면 ‘삶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삶’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에 ‘ㄹ’ 받침이 있고, 그 옆에 ‘ㅁ’ 받침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혹 국어학을 공부하시는 분이 계실 런지 모르겠습니다. 국어학자들 견해에 따르면 <삶>이란 <살다>의 명사형을 말한다고 합니다. 한편 <살다의 동사형>은 <사람>이 되는데, 이 경우 <사ㄹ>에 명사형 접미사 <암>이 붙어진 형태라 합니다. 여기서 <암>은 <앎>을 뜻하는 바, 사람이란 <삶 의 앎>, 즉 <살아갈 줄 아는 자(者)>를 말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랏말ᄊᆞ미 듕귁에 달아…사ᄅᆞᆷ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ᄅᆞᆷ이 <살아갈 줄 아는 자>를 뜻함에는 뭔가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합니다.
  <사람>을 <살>과 <암>으로 설명해, 육체의 <살>과 영혼의 <앎>이 복합된 존재라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삶’과 ‘사ᄅᆞᆷ’에서, ‘사ᄅᆞᆷ’을 사랑하다의 ‘ᄉᆞ랑’과 결부시켜 말하기도 합니다. 『월인석보』 서문에 <ᄉᆞ랑할씨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경우 <ᄉᆞ랑>은 사(思)의 번역어로 <사량하다> <생각하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이 모두가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을 두고 생각할 때, 삶이란 <삶에 대한 앎>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삶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앎과 사랑>이 전제되어야 함을 알게도 됩니다.
  니체(F. Nietzsche)는 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를 말한 바 있습니다. ‘내 자신 삶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삶에 대한 내 스스로의 사랑입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참된 의미성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삶의 여행자, 그리고 삶의 길 속에서 내 자신 삶에 대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스핑크스의 질문에 어떤 해답을 주어야 할 것인가? 등은 삶의 영원한 ‘숙제’로 남아지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숙제를 등에 업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삶의 시간이 마감되는 날, 진리의 문에 들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삶의 궁극적 의미가 아니겠느냐? 하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조금 전, 횔덜린이란 시인(詩人)에 대해 말했습니다. “오직 사냥꾼만이 숲속 오솔길(holzwege)을 알고 있다” 했는데, 그럼에도 대부분 사람들은 삶의 길, 슬픔의 길 가운데 극심한 좌절과 슬픔만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더 이상 나아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삶이란, ‘나아가야 된다는 것’ 거기에 궁극적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위치한 어떤 위치에서도 끝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종교적 삶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피안을 향한 배
  불교에서는 의식(儀式)을 집전하는 가운데, 대중과 의식 집전자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습니다. 지금과 같은 법문(法門)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앞 사람의 등만을 마주한 채 부처님을 향해 서게 됩니다.
  이 능인선원 법당을 하나의 ‘배’라 간주해 봅시다. 그리고 배 안에 여러분은 입장권을 하나씩 들고 배에 승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어디를 향해 떠나가는 배 이겠습니까? 제가 가끔 부르는 노래 중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가 있습니다. ‘떠나가는 배’, 지금 우리는 입장권을 손에 쥔 채 ‘능인선원 법당’이라 불리는 배에 타 있습니다. 지금 이 배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겠습니까?
  제가 있는 단 위에는 높은 법상(法床)이 놓여 있습니다. 법상에 올라 있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배의 선장이 앉아 있습니다. 뱃머리에는 선장과 일등 항해사도 있을 것이고, 조타수, 기관사 등의 소임을 맡은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항해사, 이등항해사 등 여러 역할을 맡은 분들이 배 안에 승선해 있기도 합니다.
  단 위, 법상에 올라선 사람이 배의 선장이라면, 선장은 배에 승선한 사람들을 하나의 세계에로 인도해 나갑니다. 이 배가 나가야 할 목적지는 어디겠습니까? 불교에서는 ‘진리의 세계’라 말합니다. 즉 진리의 세계를 향해 떠나가는 배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허망한 세계인 것처럼, 가공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 안개에 가려진 ‘이어도’와 같은 이상(理想)의 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입장권을 손에 쥔 채 ‘이어도’ 전설의 섬 같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소망을 갖고서 법상에 오른 선장은 뱃머리를 운전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바다 속 암초가 솟아 있기도 합니다. 암초를 피해, 역경을 헤쳐 거친 바다 넘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곳을 ‘피안(彼岸)의 세계’라 말합니다. 그 배 안에 여러분이 앉아 계십니다.
  피안을 향한 배, 승차권을 손에 쥔 여러분 중 한 사람만이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서로의 노력 속에 공동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큰 배에 붙은 작은 쾌속선을 내려 피안을 향해 가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이상(理想)의 땅은 쾌속선 아닌 큰 배와 함께 있을 때만이 폭풍과 암초의 위험을 물리치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타 종교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신자(信者)’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천주교 신자’, ‘기독교 신자’ 그렇게 말합니다. 놈 ‘자(者)’ 자를 씁니다. 각각 개개인이다 이겁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불교신도’ ‘신도증’ 그렇듯 무리 도(徒)자를 씁니다. 하나의 무리, 하나의 떼. 이렇듯 불교 신앙은 독자적 신앙이 아닌 공동의 노력 속에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험난한 바다의 작은 쾌속선, 구명보트에 의지해서는 죽음을 만나기 쉽습니다. 독자적 신앙이 아닌, 서로의 연계성 속에 진리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공동체성을 불교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테마가 조금 벗어나고 있습니다. 처음 말했던 바와 같이 ‘나(我)’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가?’
  근래 출간된 책 제목 중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구를 본 바 있습니다.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상당히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요즘 심리학자들 사이에 ‘역행최면’ 기법이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역행최면이란 기법을 통해 상담자의 과거 시간으로 기억을 되돌려, 현재 마음에 생겨나는 감정의 원인 등을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담자의 내면을 치유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치유 사례를 보면, ‘역행최면’을 통해 상담자의 전생 기억에 접근한 예가 다수 보고되었다고 합니다.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사람들 내지 사건들은, 일정 부분 과거와의 관련 속에 풀어 헤치지 못한 일들이 현생 가운데 되풀이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현생의 부부는 과거 시간 중 그리운 연인 내지 원수지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 역시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흔히 농담조로 ‘부부 내지 자식은 과거의 원수’라 말합니다. 또한 지인(知人) 사이에 뭔가 응어리를 남긴 채 죽은 사람은 현생 가운데 또다시 만나, 다시금 응어리 맺혀질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저와 여러분과의 만남, 여러분 가족들 사이의 만남, 일상 속의 무수한 만남들은 전생 중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 짓게끔 마련된, 되풀이되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만나, 전생의 관계 속에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이 어떻게든 마무리될 수 있도록 삶이 조건 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왜 다시 만나야만 하는가?” 그것은 만남 가운데 분명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 ‘숙제’가 우리에게 제시되는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남을 통해 만남의 이유를 파악한 채, 그 이유를 풀어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그것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 중 오늘 법회 후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사람 내지 사물, 사건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만남에는 분명 어떤 까닭이 있습니다.
  ‘나의 삶의 의미성’을 그 만남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삶 속에는 풀어 헤쳐져야 할 어떤 문제가 있고, 그것을 풀어 헤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삶이라는 현상 가운데 우리는 영혼과 육신을 갖고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현재의 삶 속에서 누굴 만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과거 전생 가운데 누군가를 서운하게 하였던 사람, 그 서운함을 빚 갚기 위해 이 세상 삶의 조류를 타고 계신 분이 있을 겁니다. 흔히 “전생에 내가 무슨 빚을 졌나 보다” 라고 말합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갚아야만 하기에 삶의 조류에 휩쓸려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풀어 헤쳐져야만 하는 그 무엇, 그것을 제대로 풀어 헤치는 속에서 내 삶의 의미성에 대한 해답을 내린 채, 삶을 마감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이란 죽음이라는 현상과 함께 찾아옵니다. 지금 여러분이 삶을 산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은 아주 단순합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과 대면하게 된 것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이란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 속에서 삶을 살아감에도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니까요. 전생에 응어리진 어떤 사람을 만나 응어리를 풀기 위해 태어났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전생 가운데 마무리 짓지 못한 상황을 마무리 짓기 위해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직면하는 사람들, 내가 직면하고 있는 사건과 상황들을 맞닥뜨리는 가운데 “지금의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마련해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조금 전 임마누엘 칸트의 예를 들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일상 가운데 마주치는 사람들, 사건들 속에 분명 풀어 헤쳐야만 하는 문제들, 그것을 다시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태어났고, 그것을 풀어헤친 가운데 우리는 평온한 마음으로 평온의 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문의 뜻
  오늘 제가 능인선원 법당, 법상(法床) 위에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법상에 앉은 법사(法師)는 무엇입니까? 우주만유의 법(法)의 원리를 파악한 사람이 법상에 앉아 법을 설할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법문(法門)이란 법 ‘法’자, 문 ‘門’자를 씁니다. ‘법문’이란 법사가 법(法)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문(門), 그 문을 열어젖혀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내용들, 그것을 통해 여러분이 진리의 세계 법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을 때, 이 법문의 참된 의미가 완결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들, 그것이 여러분 앞에 놓인 수많은 문들 가운데 하나의 문이라도 열어젖힐 수 있음에 도움이 된다면, 지금 한 시간 동안의 제 말과, 제가 이 자리에 앉게 된 의미가 완결될 것입니다.

 

  마무리 지으면서 횔덜린(F. Hölderlin)의 시 구절을 다시 전해 드립니다. “오직 사냥꾼만이 숲속 오솔길(holzwege)을 알고 있다.”
  여러분도 참된 진리의 사냥꾼 되어 나름의 삶의 길 속에서, 숲속에 나 있는 오솔길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또 하나, 의상(義湘)스님께서는 「법성게」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증득한 지혜로만 알 뿐이요, 나머지 경계가 아니다”는 말…
  이렇듯 제가 말씀드린 내용들, 횔덜린의 시 구절, 의상스님의 짤막한 교훈, 그와 함께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난 삶’ 가운데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