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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16 00:26
스님이 이야기 하는 종교의 의미(정각스님, 후곡성당, 2019.12)

원본 출처

https://blog.naver.com/honamwon/22175531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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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 스님

성당의 분위기는 항상 엄숙하다. 성당 전면 중심에 위치한 제단은 더욱이 그러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십자고상이 있고 그 앞에는 제단이 위치한다. 제단은 최후의 만찬을 상징하는 식탁이다. 제의를 입은 사제는 신에 대한 제사 즉 미사를 이 제단에서 집전한다. 신에 대한 찬미와 찬양, 그리고 예수가 그러했듯이 빵과 포도주를 성체과 성혈을 이루는 기적적이고 성스러운 공간이다. 이러한 십자가 상과 제단에 낯선 장면이 연출되었다. 훨씬 한 키에, 파르르 파란 빛이 감도는 민머리에, 누빈 승복을 입은 한 스님이 우뚝 섰다. 강한 무공의 아우라도 풍겨났다.

정각 스님, 그는 일산 식사동 원각사 주지 스님이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출생했고, 신부가 되기 위해 카톨릭 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했다. 철학에 심취했고 결국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무작정 택시를 타고 ‘아무 가까운 절에 가달라’고 하여 도착한 곳이 성북동 개운사 라고 한다. 그게 그의 길이었다고 한다.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인디아에서 2년 동안 머물며 동양 철학을 연구한 ‘학승’이다. 그 스님이 ‘종교와 신앙의 의미’를 이야기하기 위해 천주교 제단에 섰다. 

원래 천주교와 불교가 강조하는 수도의 방법에는 유사점이 많다. 명상, 묵상, 기도가 그러하다. 혹자는 천주교와 불교의 합장하는 모습도 유사하다고 한다. 차이점은 불교의 합장은 두 손을 합쳐 펴나, 천주교의 경우는 오른 손 엄지를 왼손의 엄지 위로 포개어 두 손을 모은다. 천주교의 묵주와 불교 염주의 유사성도 이야기하는 분도 있다. 또한 개신교와는 달리 천주교와 불교의 지도자들은 성탄절과 석가 탄신 일에 상호 방문하여 축하도 해준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친교도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성당에서 스님의 강연을 듣는 것은 생경한 장면이다.

복식 호흡 발성의 묵직한 목소리로 그가 꺼낸 첫 이야기는 의외였다. 몇 년 전 국가인권위원회 산하 ‘차별 분과 소위원회’에 한 진정이 접수되었단다. 그 내용은 신부, 목사와는 달리 왜 스님이라고 부르냐는 것이었다. 그 스님의 ‘님’ 에 성직자를 칭하는 용어 상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댓글에는 예를 들면 정각 스님의 ‘님’자를 빼고 ‘정각스’, ‘정각승’, ‘정각중’으로 하자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한 분의 식견에 감탄을 한다. 스님이 스에 님자가 붙은 단어로 해석한 창의력과 상상력에 감탄한다. 그들도 교회나 성당에서 김 신부, 김 목사라고 하지는 않는다. 스님이라는 단어가 존경어인 님이 들어가서 차별적인 호칭이라니?

그는 ‘스님’과 ‘중’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스님이란 단어는 1900년초 ‘승님’ 이라는 표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스님으로 표기가 바뀐 게 아닌가 추측된다고 한다. 그리고 중이라는 칭호는 고대 신라 신정 일치 시대의 최고 통치자, 왕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라시대에 왕을 지칭하는 명칭으로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이 있었다. 거서간이란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 에게만 사용된 호칭으로 국방 책임자를 뜻한다. 차차웅은 2대 남해 에게만 사용된 칭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웅으로 변화되고 발음이 축소되면서 차충, 듕, 중 등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화랑세기〉에 보면 차차웅은 무(), 무당을 뜻한다. 무()를 살펴보면 하늘과 땅을 잇고 그 옆에 사람 인()자가 위치해 있다. 즉 하늘과 땅을 연결 짓던 사람이 무당, 즉 신정일치국가에 있어 제사장이면서 국방을 책임지는 왕이었던 것이다. 이사금이란 칭호는 3대 유리 이사금부터 18대왕인 실성 이사금까지 쓰였다. 이사금이란 요즘 말로는 이빨 자국으로 해석이 되며, 유리와 탈해가 왕이 되는 것을 서로 양보하는 상황에서 떡을 베어 물고 이빨자국이 많은 자가 왕이 되는 것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빨 자국이 많음은 현명한 자로 해석이 된 것이라고 한다. 이빨 자국의 고어인 입금이 현재의 임금으로 변화되어 왕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마립간은 19대 눌지 마립간부터 22대 지증 마립간까지 쓰였고, 마립이란 대청 마루 높은 곳 또는 산마루, 고갯마루에 쓰이듯이 ‘꼭대기나 높다’를 의미하는 순 우리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립간이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다음으로 스님은 종교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종교의 영어 단어에 대한 질문을 했다. Religion이라는 영어 단어가 종교 (宗敎)로 번역된 것은 메이지 유신 시대 일본의 스즈키 젠코 라는 스님에 의해서 였다고 한다. 즉 마루 가르칠 라는 것은,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으뜸()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religion’의 라틴어 어원을 해석해 보면 달라진다고 한다. re는 라틴어로 ‘다시’ ‘재생’이라는 뜻이며, ‘ligion’이란 ‘연결하다’ ‘결합하다’의 뜻이라는 것이다. 즉 ‘다시 연결한다’는 것이 Religion의 본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연결한다는 뜻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야훼가 태초에 빛을 만들고 흙에서 사람을 만들어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자 하늘에서 야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하느님이 사람에게 처음으로 한 질문이다. 그는 이 질문을 단순히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이는 아담의 대답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담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앗쑴 (Adsum)’이라고 답했다. 이 히브리어 앗쑴은 영어로 ‘여기 그리고 지금 (here and now)’라는 뜻이다. 아담은 자기가 위치한 현 시간성과 공간성이 결합된 답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 그리고 지금’은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된다.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 좌표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실존, 종교의 의미,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힘든 나날을 보낸다. 사과나무 이전의 신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성의 회복이 바로 Religion이다. 즉 원죄 이전으로 관계성 회복이 바로 종교의 원래 의미인 Religion이라는 것이다.

‘신화의 힘’의 저자인 조셉 켐펠이 이야기 했듯이 그는 종교의 의미를 미사 (Missa)라는 단어에서 찾는다. 미사는 ‘내몰다, 내쫓다’라는 뜻의 ‘미떼레(Mittere)’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다시 파견하다는 뜻의 영어 단어 인 mission으로 변형된다. ‘미사’ 란 현실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차원으로 밀어 부치는 힘과 행위를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현실의 삶에 만족하지 말고 끝없는 현실의 부정과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신앙인에게는 매순간이 미사이라는 것이다. 즉 종교는 여기 머물지 말고 또 다른 삶의 지평으로 나를 내모는 것이 바로 종교와 신앙인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종교는 얽매여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Dogma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하다면. 베이컨이 말했듯이, 극장의 우상이며, 밝은 곳만 바라보는 동굴의 우상이 된다. 종교도 동굴의 우상에 갇혀있을 수 있다. 플라톤이 이야기 했듯이 현실 저 쪽에 있는 이데아 세계를 상정해야 한다. 또 다른 세계를 바라 보아야 한다. 육체라는 감옥에서 갇혀있는 정신, 영혼을 해방 시켜야 한다.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리에 대한 테오리아 [theoria], 즉 인간의 영혼이 순수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조, 묵상을 해야 한다. 이 관상, 묵상이 수도원의 수행 방법이다. 그래야 이데아로 나아갈 수 있다.

이어 그는 종교에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종교에서 사랑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아브라함에게 신은 아들인 아시악을 번제물로 바치게 명한다. 번민과 고뇌 속에 (그는 실존의 의미를 찾은 것으로 해석했다) 주저 하지 않고 칼로 내리치려고 순간 천사가 이를 말린다. 이는 신에 대한 사랑이며 헌신에 가깝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과 야훼의 관계에서의 헌신이다.

삶, 사람, 사랑의 어원은 같다. 고어에서는 사랑을 생각 사()자를 쓰고 사랑의 고어인 사량(思量)으로 번역했다. 생각하고 헤아린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 사 ()자 이다. 즉, 밭 과 마음 이 결합된 것이다. 이는 타인 마음의 밭을 내 자신의 마음으로 관조하는 것을 이야기 하며,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남을 보살펴준다는 것과 연결된다. 종교의 의미 역시 사람, 사랑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불교의 사랑은 자비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랑, 아가페이다. 자 () 는 자애를 말하며, 비 ()는 연민 (憐憫)이다. 불교는 자애로움과 슬픔, 연민의 종교이다. 연민이란 타인을 위해 한 번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것을 이야기 한다. 니체는 어린 시절 여자 옷을 입혀 키워졌다고 한다. 이는 여성적인 감수성을 함양시키기 위한 부모의 선택이었다. 어느 날 우마가 짐을 싣고 언덕을 올라갈 때, 채찍과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고, 니체는 눈물을 흘렸다. 우마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다. 이것이 인간성의 의미이다. 바로 니체처럼 소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종교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소 한 마리를 보고 우리는 과연 연민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하고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을 위해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종교의 마음이다. 신앙인은 이렇게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안도현의 시를 낭독하고는 종교적 심성은 타버린 연탄 한 장이라고 했다. 이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신앙인이라고 했다. 스님은 우리는 연탄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하며 강연을 마쳤다.

1시간 남짓의 강연, 하지만 수천년의 긴 여행을 마친 듯한 느낌이었다. 천지창조부터, 고대 신라시대, 중세 시대의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 온 듯 했다. 종교의 뿌리는 역시 사랑과 연민이었다. 그것이 종교와 신앙인의 의미와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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