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송광사 일산분원 원각사(주지 정각스님)에서 열린 정목스님 초청법회에는 아이와 어른 등 가족단위의 400여명 인파가 몰려 웃음과 박수가 넘쳤다. 10월28일 원각사 식사동 법당에서의 ‘행복한 소통을 위한 세 가지 방법’을 말한 정목스님은 “정서적 행복감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이뤄지므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는 불교의 ‘불이(不二)’정신으로 돌아가라”고 강조했다.

 

 스님이 1시간 반 동안 특유의 현장감 넘치는 목소리로 법문하는 동안 법당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정목스님은 현재 정각사 주지(서울 성북구)이면서 인터넷 유나방송(una.or.kr) 공동대표이며, 최근 저서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를 출간했다. 법문은 <불교신문> 팟캐스트로 들을 수 있다.

   
정목스님이 10월28일 고양 송광사 일산분원 원각사 초청법회에서 ‘행복한 소통을 위한 세 가지 방법’을 말하고 있다.

 

 

4월 책 출간이후 기업과 여러 단체, 심지어는 교회 장로님들의 모임 등 다양한 곳에서 초대를 받아 연일 강연을 나가고 있다. 최근 강연을 다니면서 현장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있다. 출가 이후 수많은 포교의 현장에 서 보았지만, 최근에 얻은 것이 오히려 더 많은 듯하다.

 

우리는 그동안 살기 위한 열정 하나로 자기 자신과 앞만 보고 살아오면서 남을 살필 기회가 없었고 타인의 성공이 나의 실패라고 믿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밟고 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에 익숙해지다 보니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다른 누군가의 탓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런 분리감이 많은 정신적인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우리의 몸은 우울증과 불면증,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비로소 얻고 성취하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그대가 있고, 그대가 고통이면 내가 고통이다’는 부처님의 연기법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최근 서점가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수많은 행복에 관한 책도 결국은 이런 가르침에 귀결되어 있으며 스님들의 책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러한 원리에 기반하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서로 서로가 윈윈하는 원리, 이것은 21세기를 이끌어갈 화엄사상이다. 인드라망, 즉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이 세계는 그물코 하나하나가 서로를 받쳐주고 지켜준다. 새벽에 히말라야산 오렌지 빛의 태양이 빛을 비추듯이, 하나의 빛이 반사되고 서로 서로 비추면서 전체 히말라야 연봉들이 장관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 역시 화엄의 도리 안에 있으며 연기법에 의존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하고, 그대가 슬프면 내가 슬프고 내가 슬프면 그대가 슬퍼지는 오묘한 진리가 먼 곳이 아니라 내 손안에 있다.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고 협조하는 인간의 본래 마음이 근원으로 돌아가 보면 화엄의 도리인 것이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타인과 소통할

‘경청’의 마음자리 만들어져

 

우리는 삶 속에서 너와 내가 하나라는 연기의 진리를 잊어버리고 서로가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막는 행위를 자주 저지른다. 언젠가 내가 ‘행복을 방해하는 7가지 요소’를 꼽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는데,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많은 이들이 리트윗을 하며 공감했던 적이 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쉽게 저지르게 되는 타인과의 원만한 소통을 방해하는 7가지 행동들에는 이런 것이 있다.

 

첫째, ‘지레짐작하기’이다. 미리 지레짐작하기는 우리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6가지 기능을 과거의 기억으로 묶어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만든다. 듣지 않아도 뻔하다고 생각하면서 앞질러 생각하는 것이다. 지레짐작은 먹구름에 갇힌 번뇌 같아서 대화를 단절하게 만들고 마음이 멀어지게 한다.

 

둘째, ‘상대방의 마음 분석하기’이다. 되고 안 되고 하는 나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의 마음을 재는 것이다. 내 책의 제목 ‘달팽이는 느려도 늦지 않다’처럼 우리는 상대가 살아가는 삶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달팽이가 한없이 느려 보이지만 달팽이의 기준에서 보면 합당한 속도이다.

 

셋째로는 ‘이심전심이라고 생각하기’이다. 그의 우주는 내 우주와 다르다. 종종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가까운 가족일수록 자신의 메시지를 정확히 전해야 한다. 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본래의 마음은 그게 아니면서 말이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 말은 그저 우주를 연결하는 도구일 뿐이다. 말만 믿고 상대의 마음까지 내 마음처럼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오류가 생긴다.

 

넷째, ‘모든 것을 탓하기’이다.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여기에는 ‘뭐 때문에’란 원망감에 의존한다. 이것은 의식수준이 어린이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책임지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가 바라는 변화는 내가 나를 바꾸는 혁명과 상대를 탓하는 태도를 멈출 때 시작된다.

 

절에서 기도할 때도 마음 속 깊은 곳에 탓하려는 마음을 멈추면 기도의 태도가 달라짐을 느낀다. 기도하는 그 순간이 온전해지며 성장할 수 있다.


상대방의 성취와 행복 지지하고

함께 기뻐하면 행복 저절로 온다

 

다섯째는 ‘매사에 다른 이와 비교하기’이다.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도둑심보이다. 타인의 능력이 내 아이에게 없다고 생각해 비교를 통해 이를 가져오려는 것이 불행해지는 것이다. 원래 각각이 다른 것이 정상이다. 다른 사람의 능력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눈을 떠야 한다.

 

여섯째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부정적으로 추측하기’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앞질러서 부정적으로 추측하는 것에서 더 고통이 온다. 우주는 중도이다. 좋고 나쁜 것이 기준이 아니라 될 성 싶은 것에 에너지를 밀어준다. 하는 행동이 두려움에 가득 차 있으면 안 될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미리 추측하게 된다.

 

일곱째는 ‘완벽하지 않으면 못 견디기’이다. 완벽의 기준이란 없다. 타인의 우주에선 완벽이 없다. 무언가 완벽해지기를 기대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보는 눈이 더욱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 삶에서 행복을 방해하는 7가지 요소, 즉 자기 삶에 스며있는 카르마(업)가 무엇인지를 보았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이런 행위들은 타인과의 소통을 막는 벽이다. 하지만 이 벽을 무너뜨리면 벽은 타인과 나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며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행복한 소통의 문을 여는 세 가지 방법을 알아보자. 타인과 행복한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를 실천해야 한다.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만이 타인과의 소통할 수 있는 ‘경청’의 마음자리가 만들어진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지지 않으면, 남의 말을 경청할 수 없다. 누구의 말도 들어 올 여백이 없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 위해 먼저 자신의 몸에 말을 걸어라. 자신의 몸을 보살펴야 자신의 아픈 곳에 진심으로 사죄하게 되고, 몸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연민을 느껴보라. 내 안에 사랑이 가득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다음은 ‘자신과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라’이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게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있는 그대로 타인을 바로 보는 눈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이해’로 통한다.

 

세 번째 방법은 ‘지지하고 협력하라’이다. 타인의 행복을 빌어줄 때 우리는 행복에 도달한다. 진심으로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신에게도 복이 되며 원만한 소통을 위한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지게 한다. 상대방의 성취와 행복을 지지하고 함께 기뻐하면 행복이 저절로 온다.

 

우리 생활에서 수입과 지출은 돌고 도는 것이지 둘이 아니다. 내가 옷을 사면 옷이 들어오고 돈이 나간다. 하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돈이 들어오고 옷이 나가는 것이다. 큰 우주의 눈에서 보면 수입과 지출은 하나인 것이다.

 

티베트전통 자비수행법 중 통렌(tonglen)수행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내가 받아들이고 세상을 향해 내 안의 밝은 빛을 내보내는 명상을 한다. 이것은 자신과 타인의 행복과 고통을 교환하는 수행인데 이 수행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처님은 ‘이 찰나에 잘 살라’고 가르치시기 위해 ‘극락정토가 있다’는 방편의 가르침을 남기셨다. 극락과 깨달음은 별개의 존재이다. 백지바탕으로 돌아와 한 걸음씩 가능한 것을 하고, 어려운 경전에 욕심내기 보다는 <반야심경> 하나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진실해진다.

 

수행의 시발점은 진실해지는 것이고, 부처임이 바꿔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잘못을 인정해야 해야 내가 나를 교정한다. 

 

[불교신문 2865호/ 11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