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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이 먼저 알아본 의승장 영규 업적(현대불교. 201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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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이 먼저 알아본 의승장 영규 업적
  • 신성민 기자
  • 승인 2019.06.20 21:33
  • 댓글 0

 


김성순 연구위원, 첫 공개 ‘영규사실기’ 분석·주장

임진왜란 당시 의승장으로 활약했던 기허 영규 대사의 행장이 담긴 기록이 발굴돼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된다. 기록 분석 결과 영규 대사의 공적은 서산 계열에 비해 불교 내부에서는 인정받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영규 대사의 선양은 유교적 시각이 가미돼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김성순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연구위원은 622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리는 고양 원각사(주지 정각) 주최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제9회 학술대회에서 이 같이 주장을 펼친다.

22일 동북아불교학술대회서
영규 대사 기록 희소 중요자료

서산 비해 당시 불교 선양 전무
200년 후 계룡산에 사우 마련돼
영규사실기, 불교·유교 시각차
해소 위한 유교 지식인의 노력
고양 원각사 소장 성보들 조명도

이날 갑사 사적을 통해 본 의승군 영규대사의 활동 연구를 발표한 김성순 연구위원은 원각사에 소장된 <갑사사적(岬寺史蹟)>에 수록된 임진의병승장복국우세 기허당대선사일합영규사실기(壬辰義兵僧將福國祐世騎虛堂大禪師一篕靈圭事實記, 이하 영규사실기)’를 분석했다.

<갑사사적>갑사사적시종기와 한시, ‘영규사실기로 구성돼 있으며, 학산거사 김상표가 서()를 쓰고, 호은산인 임옥현이 저술한 것이다.

특히 대중에 처음 공개된 영규사실기는 비문 외에 영규 대사 관련 기록이 거의 없는 발굴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규 대사 관련 내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영규사실기>는 영규 대사의 생애 전반을 살핀다. 기록에 따르면 영규 대사는 계룡면 널티 출신으로 밀양박씨다. 그는 19세에 계룡산 만정 북록(현 연천봉) 청련암에서 출가했으며, 영변 묘향산에서 서산 문하에서 20년간 수학하며 여러 범어경전과 외서를 공부했다. 공부를 마친 영규 대사는 은사의 뜻에 따라 갑사로 가서 주석하게 된다.

또한 <영규사실기>에는 영규 대사가 갑사에서 불목하니로 살았다는 것을 대응하기 위한 윤색들이 보여진다. <영규사실기>에는 영규 대사가 갑사에 있으면서 사제들을 도와 스스로 장작을 잡았고, 이를 쪼개 목검처럼 사용해 무예를 익히는 것이 묘사돼 있다. 기다란 박달나무를 창고에 숨겼다고 기술돼 있는데, 이는 전란을 예지하고 무기가 될 만한 나무를 준비하는 모습이라는 게 김성순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영규의 검소함을 설명하는 대목도 있다. <영규사실기>에 따르면 영규 대사는 여름에는 베옷만, 겨울에는 솜도 넣지 않은 옷을 입었다. 이에 사중 대중들이 지나치게 검박하다고 지적하자 영규 대사는 옷이라는 것은 단지 몸을 덮는 것이면 족하다고 답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승병을 모집해 전장으로 간 영규는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 전과를 세우지만 1592818일 금산 연곤평에서의 전투에서 영규와 조헌의 부대는 격전 끝에 전멸하게 된다. 영규의 의승군 활동은 임진왜란 초기에 이뤄진 것으로 이후 승병 궐기의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전란 이후 영규 대사는 불교 내부에서는 추승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실제 영규 대사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계룡산에 진영각이 세워진 것은 이를 설명해주는 단초다. 반면 영규 대사 추승은 당시 지도층이었던 유학자들에게서 이뤄졌다.

18세기 학자인 황경원(1709~1787)<강한집> ‘영규대사사절기서 유교적 인간상인 인인(仁人)’을 승려인 영규에게 대입하고 있으며, 서화가 이인상(1710~1760)은 문집 <능호집>에서 영규의 의승군 봉기를 위험에 빠진 군주를 구하기 위한 충절로 해석하고 있다.

조인영(1782~1850)은 자신의 문집 <운석유고>에서 영규의 의승군 활동에 대해 불은이 곧 군은(佛恩亦君恩)’이라고 정리하며 영규 대사는 불국토를 수호하듯 왕조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전사한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18~19세기에 걸쳐 지도층을 중심으로 영규 대사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가 이뤄지자 그제서야 불교계도 반응하게 된다. 정규한의 문집 <화산집> ‘기허대사충렬원기에 따르면 영규 사후 200년이 지나서도 계룡산 갑사에 사우(祠宇)가 없는 것을 스스로 자책하는 승려들이 말이 인용돼 있기도 하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김성순 연구원은 영규에 대한 당시 불교계의 무관심은 그가 불목하니 출신이기 때문일 수 있고, 서산계 법맥에서 분명치 않은 그의 위치 때문일 수 있다면서 반면 후세 유생들은 불교보다도 훨씬 열성적으로 영규 대사를 부각시키려 했다. 사후 200년이 지나 세웠던 계룡산 사우마저도 유교 관료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었던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영규사실기는 영규 대사에 대한 불교와 유과 간의 시각적 불균형을 교정하려 했던 당시 유교 지식인들의 노력이 담긴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와함께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고양 원각사의 소장 문화재들을 학술적으로 조사 연구한 논문들이 발표된다.

중앙승가대학 교수 정각 스님(원각사 주지)은 조선통폐지인 연구, 최선일 문화재청 감정위원은 원각사 소장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조각승 성수, 김요정 충북대 초빙교수는 원각사 소장 목조불상의 과학적 분석, 신광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는 원각사 소장 현왕도 연구를 각각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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